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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전달되는 브랜드의 진실> 거대 기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성공이 단순히 거대한 규모나 압도적인 기술력만으로 이뤄진 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철학과 진심, 바로 ‘심성(心性)’의 존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지 창간 14주년을 맞이해 기획한 ‘심성 브랜드 전략’ 시리즈란 이처럼 기업의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음과 철학’의 가치를 조명하는 노력입니다. 여러모로 기적에 비유돼 온 대한민국 산업화… 조선(造船) 역시 극적인 요소가 풍성합니다. 제해권이 곧 세계 패권인 시대, 조선업 역량은 제조업 강국이자 통상국가인 대한민국 국력을 떠받칠 뿐 아니라 미·중 대결의 한복판에서 지정학적 중심추 역할까지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세계 조선업 강자 위상을 차지하게 된 과정은 세계사적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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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관성’을 넘어선 ‘바다의 상상력’
500여년 전 대항해시대와 지리상의 발견 이래 인류사에 비로소 ‘전 지구적 차원의 시각’이 출현했다. 이는 해상 패권을 거머쥔 자가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시대의 도래였다. 이런 시대상에 일찍 대처할수록 빨리 선진국 자리를 차지했다. 15세기 말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우월한 문물과 경제력을 지닌 무굴제국·중화제국이 서유럽의 식민지·반(半)식민지로 전락한 결정적 배경은 바다에 무심했기 때문이다.
외부와 교역하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었던 중국대륙·인도아(亞)대륙과 달리 서유럽은 먹고살기 위해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이 인도·동남아·아메리카대륙을 손에 넣었다. 큰 바다로 나아가고자 배를 만드는 것, ‘조선(造船)’의 의미가 그래서 각별하다. 구대륙 끝자락, 대륙의 일부로서 수천년간 농경문명적 문화·습속·사고방식이 뿌리깊은 한반도 남부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바다 너머를 상상하면서 움텄다.
해양문명과의 접속이 곧 ‘근대화’였고 자유와 풍요를 향한 긴 여정의 출발이다. 사농공상 질서의 가난한 농업 사회였던 한반도는 열악한 환경 탓에 더디게 증가한 인구조차 먹여살릴 생산력을 키우지 못한 채 20세기 후반을 맞았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조국근대화’에서 조선업은 국가경제 뼈대를 지탱한 기반 산업이었다. 한국 조선업 자체라해도 좋을 현대조선이 다른 부문 발전의 버팀목 역할을 한 셈이다.
창업주의 결단과 자신감, 16세기 ‘거북선’으로 미래 가능성을 증명하다
조선업의 문명사적 의미가 원래 지대하지만 대한민국 산업사에서 유독 극적이다. 현대조선은 1970년대 초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주)의 결단에서 출발했다. 세계 조선 시장을 일본·유럽이 독점하던 시절, 1972년 울산 바닷가 허허벌판에 세계 최대 조선소가 착공됐다. 앞서 1971년 9월 영국 등에서 차관 및 기술 도입을 타진할 때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게 우리 거북선입니다. 영국보다 300년 앞서 만든 철갑선이지요. 위정자들이 어리석어 한때 나라가 망했습니다만 이제 다시 배를 만들려 합니다.” 정 회장이 선박기술회사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설득할 때, 또 바클레이즈은행을 찾아 차관을 요청할 때 ‘거북선 그림’이 들어간 지폐를 꺼내 보이며 역설했다는 대목은 전설적 색채를 띠고 전해진다.
정 회장의 자신감·열정·순발력이 무일푼 대한민국을 “400년 전 철갑선을 만든 사람들의 후예”로 만들어 미래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결국 1972년 울산 미포만을 매립해 이듬해 6월 현대조선소가 공식 가동하면서 그리스 해운왕 리바노스 하청의 초대형 유조선 두 척 제조도 함께 진행된다. 이로써 조선소 완공 전에 첫 수주를 받아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든다’는 전무후무한 역사가 쓰여졌다.
1974년 6월 26만t급의 첫 유조선 아틀란틱배런호(號)를 진수시키면서 한국이 지구촌 조선업계에 발을 들였다. 황당무계해 보였던 꿈을 실현한 순간이었다. 이후 현대조선은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첨단 선박을 빠르게 확보하며 한국을 조선 강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정주영의 도전 정신, 현대가 걸어온 길은 기업가 신화를 넘어 국가적 신화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초 한국은 ‘1000달러 국민소득’이 목표인 개발도상국이었다. 전문가 식자들의 통념을 뒤엎고 박정희 정부는 수출 지향 산업화를 추진하며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내세웠고 그 중심에 현대조선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현대조선을 비롯한 국내 조선사들은 대형 유조선, 벌크선, 컨테이너선, LNG 운반선 등 다양한 선종에서 입지를 넓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을 추월해 수주 실적 세계 1위 국가가 된다.
현대조선은 해양플랜트·특수선·군함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서 조선업은 한국의 기계·철강·전자산업 전반을 끌어올리는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울산이 ‘조선의 도시’로 변모했으며 수십만 명의 고용을 창출해 대한민국 중산층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중산층이야말로 민주화의 추동력이자 저력이다.
중국이라는 적수… HD현대중공업으로 변신
영광만 계속되진 않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때 조선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조선사들의 재무 구조가 급격히 악화되는 가운데 현대조선 또한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지주회사 체제 개편을 통해 ‘현대중공업’으로 거듭났으나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저가 공세를 무기 삼아 급부상하면서 한국 조선업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중국이 벌크선·중형선박 부문에서 압도적인 물량을 쏟아내자 한국 조선사들은 초대형 컨테이너선, 고부가가치 LNG선, 해양플랜트 등 첨단·고난도 분야로 전략을 바꿔야 했다.
현대조선은 HD현대중공업이 된 후 지주회사 HD현대 아래 에너지·건설기계·로보틱스 등 다양한 계열사와 함께 운영된다. ‘현대조선’이 이젠 과거의 이름이지만 그 정신은 한국 조선산업의 핵심에 살아 있다. 오늘날 HD현대중공업은 세계 최대 조선소로서 연간 수십 척 초대형 선박을 인도하며 친환경 선박 시장의 선두를 달린다.
한국 조선업, 美 ‘마스가’의 파트너
21세기 조선업은 에너지 전환과 글로벌 해양질서, 나아가 전 세계 패권질서와 맞물려 있다. 기후변화 대응, 해상 물류망 재편, 북극항로 개발, 해양 자원 탐사 등이 장차 조선산업의 판도를 가름할 전망이다. 현대조선 후신인 HD현대중공업은 중국의 물량 공세와 일본의 기술력 사이에서 친환경·스마트 선박으로 진화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떠안았다. 그 성공 여부가 한국의 글로벌 위상과 직결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현대는 군수·방위 분야로 영역을 넓혀 미 해군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한국형 구축함과 잠수함 건조 과정에서 미국의 기술 지원과 공동 프로젝트가 이어졌고, 이것이 곧 한국 조선업의 세계 군함 시장 내 신뢰 구축의 계기이기도 했다. 미·중 대결 구도 아래 미국과의 조선업 협력 방식 역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최근 현대는 미 해군과 해상 방위체계 협력을 이어가며 동북아 안보 질서 속에서 한·미 조선 협력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조선업이 그 어느때보다 국가 전략 자산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세계 최대 최강이었던 미국 조선업은 1970년대 이후 인건비·환경 규제·경쟁력 약화로 쇠락을 거듭했다. 미 보수진영의 구호 ‘마가’(MAGA)를 패러디한 ‘마스가’(MASGA·미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쳐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며 미국 혼자 힘으론 신속한 재건이 불가능하다. 현대는 세계적인 기술력과 가성비 면에서 미국에게 최고의 전략 파트너로 꼽힌다.
8월 HD현대중공업과 자회사 HD현대미포조선의 통합이 발표됐을 때 함정 건조 역량을 확대하고 미 마스가 프로젝트 수혜를 극대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됐다. 우리 정부도 ‘한·미 조선해양산업 기술협력센터’ 사업을 위해 66억4000만 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 이 프로젝트 일환으로 ‘마스터스 아카데미’가 신설돼 미국 현지에서 선박 설계, 용접·생산 기술 등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될 계획이다.
한·미 간 조선업 관련 규제 완화, 건조 방식 다양화, 부품 모듈화·최종 조립 방식 조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 접촉이 이미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법적 규제 돌파가 시급하다. 미국엔 1차 세계대전 이래 조선업 보호 및 안보상 이유로 선박의 제조·운영·보수·소속·인원 등을 미 국적·영토 내로 한정한 법률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의 개정 내지 우회 방안을 위해 미국 의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륙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해양문명의 꽃...
울산의 바람은 여전히 바다 냄새를 머금고,
거대한 선체들이 오늘도 파도를 향해 미끄러져 나간다.
그 안엔 단순한 강철이 아니라
불가능을 향해 내디뎠던 한 시대의 심장이 뛰고 있다.
현대조선의 역사는 결국 바다와 거대한 배의 이야기이자,
큰 꿈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젠 미국과의 방위 협력을 넘어
세계의 바다를 지키고 열어가는 길 위에 서 있다.
먼 바다로 나아가는 그 선박처럼,
현대의 정신이 여전히 속삭인다.
“할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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